황성기독교청년회의 창립과 민족사적 의의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시작될 무렵 대한제국은 세계열강의 침탈야욕과 기아 및 한발, 그리고 독립협회의 해산 등으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처럼 겨레가 소망을 잃어가고 있는 때에 무엇보다도 독립협회의 뒤를 이을 만한 민족운동체의 조직은 시대적 소명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1899년 개화청년 150명은 개화자강의 열정을 YMCA운동 속에서 실현하고자 세계YMCA연맹에 한국YMCA의 창립을 건의하였으며, 일정한 기간의 조사활동을 거쳐 1903년 10월 28일 서울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창립하였다. 한국의 첫 YMCA를 서울에 창립하게 된 것은 서울이 한국의 정치와 지리상의 중심으로 나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창립초기였던 1903년 11월 11일, 인사동에 임시회소를 마련하여 시작했던 서울YMCA운동이 체육실겸용의 공작실, 사무실, 기도실 겸용의 교실, 100명 가량을 수용하여 친교나 게임 혹은 전도 집회에 사용할 수 있는 강당을 마련하면서 민족사에 공헌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또한 1908년 회관의 낙성은 YMCA운동사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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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가 하사하여 초기 회관건립에 사용한 흙삽 (1907.11)
글씨는 영친왕이 11세때 옛회관 초석에 쓴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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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회관건립에 공이 많은 지도자들
왼쪽부터 질레트(P.L.Gillet), 와나메이커(J.Wanamaker), 이상재, 윤치호, 현흥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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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큰길에 건립된 초기YMCA회관
서울YMCA는 그 태동에 민족운동단체조직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었기에 초창기 을사조약 반대, 고종양위 반대 등의 운동을 벌였고, 친일조직인 일진회와 대결해 가는 가운데 항일운동을 벌여 나갔다. 서울YMCA는 초기 상류층 지식인 자제들이 모여 결성했으나 이후 상민층이 가담하면서 더욱 역동적이 되었고, 특히 이상재, 김정식, 윤치호, 김규식 등 민족지도자를 비롯한 기독교 지식인이 대거 가입하면서 민족운동체로서의 조직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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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서울(황성)YMCA 지도자들
앞줄 둘째부터 이대위, 윤치호, 브록크만, 이상재, 에비손, 이인영, 홍병덕등이 있고,
가운데줄에 바른하트, 신흥우, 뒷줄에 구자옥, 육정수 등이 보인다. -
한일합병에 항의하여 애국지사들이 만든 바보클럽(1910)
뒷줄왼쪽부터 조중용, 육정수, 신흥우, 홍석후, 최재학, 정태응 가운데줄 왼쪽부터 신봉희, 서상만,
이승만, 현순 앞줄 왼쪽부터 김규식, 송언용, 백상규 -
회우위원회 회의(1910)
이상재, 전덕기, 육정수, 언더우드, 게일, 이승만 등 여러 지도자들이 모습이 보임
자주와 오욕의 세월
서울YMCA 초기활동에서 두드러졌던 공헌 중에 하나는 공상교육과 체육활동의 시작과 보급이다. 당시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체계와 육체를 천시하던 시대사조에서 벗어나 농공상교육 및 체육활동을 장려 · 보급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근대화의 시위를 당긴 것이다. 서울YMCA운동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이 모든 노력은 개화자강과 인재양성을 통해 자주에 기반하는 민족의 번영을 꾀하고자 하는 일념이라 할 수 있다.
서울YMCA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평생교육기관이라는 의미에서 평생교육사적 의의가 있다. 서울YMCA 창립총회 의장이었던 헐버트(Hulbert)는 선교자이자 교육전문가였으며, 창립초기 교육위원장이었던 이상재를 주축으로 하여 윤치호, 이승만, 김규식, 신흥우 등 YMCA 지도자들을 일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신앙운동에 정점을 두면서 교양, 계몽, 학술 강좌, 뜨개질, 도자기, 비누만들기, 염색 등 실업교육을 비롯한 직업교육, 일본어, 영어 등 외국어 교육을 펼쳐갔다. 더욱이 국사와 지리 등을 가르쳐 애국정신을 함양하는데 크나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교육은 1907년 학관을 개관하면서 더욱 체계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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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초기 학관물리학수업(1907년경)
한국 최초의 화학교사인 박서양이 물리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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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학관포증서(1911)
교육부장 이원긍, 학감 그레이, 공동학감 이승만, 증서수여자 이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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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관 제 8회 졸업사진
김창제, 육정수, 이교승 선생과 당시 학생이었던 이관구(뒷줄 왼쪽끝), 홍난파(뒷줄 오른쪽 끝)
창립초기 서울YMCA의 체육활동이 독립과 구국을 위한 인재양성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1906년 서울YMCA 내에 ‘유술부’를 창설할 때에 이상재는 ‘장사 백명만 양성하면 나라에 대하여 걱정할 일이 없다’고 한 말은 이 사실을 잘 나타내 주는데 당시는 을사조약직후 군대가 해산되기 직전의 말이라 우리 민족에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초대 한국인 총무였던 이상재가 1927년 소천했을 때 그 장례행렬의 인파가 20만여명에 달했다는 사실은 서울YMCA가 얼마나 민족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고,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대변해 준다.
서울YMCA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어 보급된 운동들이 많다. 농구는 1907년 질레트가 처음 연습시켰고, 스케이트 역시 1908년 그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지고 온 것으로 겨울 삼청동 개천에서 탄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배구 역시 1915년 바른하트(B.P.Barnhart)의 소개로 크게 이목을 끌어 큰 발전을 보았다. 이 밖에도 회관 앞 가건물에서 탁구나 원반치기 게임, 심지어 육상 경기까지도 시간을 짜 연습하고 있었다. 1916년 서울YMCA가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체육관을 준공하면서 민족훈련기관으로서의 면모를 더 한층 빛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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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덴마크식 체조강습(구회관운동장, 1909)
김규식 박사가 한복차림의 나막신을 신고 덴마크식 체조를 강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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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야구 일본원정팀(1912)
뒷줄에 김영환, 현동진, 현홍운, 김유, 장용승 등이 있고 앞줄 왼쪽부터 김린, 김완혁, 김영제, 박영근, 송충근, 남승익, 이정옥, 질레트 등이 있으며, 맨앞에 허성이 앉아 있다.
이러한 서울YMCA 노력으로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1919년의 2․8독립선언과 3․1독립만세운동 지도력이 성장해 갔던 것이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시위를 당겼던 2․8독립선언은 서울YMCA와 관계가 깊다. 1906년 서울YMCA가 김정식을 일본 동경에 파견하여 재일본한국YMCA를 창립한 것이 그렇고, 실제 2․8독립선언을 결행하는데 YMCA지도력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재일본한국YMCA회관은 재일유학생들의 집회와 토론의 장이었으며, 주권을 찬탈당한 시대적 아픔에 적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1919년 2월 8일 민족적 거사인 2․8독립선언을 결행했던 것이다. 2․8독립선언에 참가했던 유학생 360여명은 귀국하여 3․1독립만세운동의 도화선을 마련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서울YMCA 관계자는 정춘수,최성모,오화영,박희도,박동완,이필수,양전백,이갑성,이승훈 등 9명으로 박희도는 당시 YMCA회원부 간사이며 학생책임자였고, 이필수는 본래 구한국정부 때 군인으로서 초창기 YMCA 체육부 간사였다. 오화영은 YMCA이사이자 종교부 위원장이었으며, 정춘수,최성모는 YMCA이사와 위원을 거쳐 학생하령회의 명강사였으며, 이갑성,박동완은 YMCA에 수시로 드나드는 열성위원이었고, 양전백은 선천신성학교 창설자로서 그 학교 학생기독교청년회의 창시자이며 특히 그 학교를 창설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서울YMCA의 박승봉과 이상재와는 오래 전부터 동지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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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이 낭독되었던 재일본 한국YMCA 구회관 (1923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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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본 동경한국YMCA회관에 모인 유학생들(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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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에서 3 · 1독립선언을 하고 있는 민족대표 33인(1919)
출처 : 민족대표 독립선언 기록화(저자-최대섭),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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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 독립운동의 기념터임을 나타내는 서울YMCA회관 앞 표석
일제강점기시대 서울YMCA운동이 이루어 낸 찬연한 성과중의 하나로 1920년대 농촌운동을 빼 놓을 수 없다. 당시 일본은 산미증식계획에 의해 경제적인 면에서 우리나라의 쌀을 일본으로 빼돌리는 등 가혹한 착취를 했다. 우리나라의 경제상태는 말이 아니었으며 농촌의 피폐와 굶주림은 극에 달했다. 전인구의 8할 이상이 거주하던 농촌을 중심으로 ‘정신적 소생․사회적 단결․경제적 향상’이라는 3대강령을 바탕으로, 농촌강습회를 통하여 농사기술을 가르치고, 각종 종자를 들여와 보급하였으며,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자립자조를 이루어 갔다. 또한 투전,음주,미신 등 농촌사회의 병폐를 몰아내는 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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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도의 농촌지도자 강습회(19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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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농민수양소(1934)
특히 1920년대는 농촌운동 뿐만 아니라 체육운동에서도 민족을 하나로 아우르는 구심점의 역할을 서울YMCA가 감당하였다. 창립 초기 서구스포츠의 도입과 보급을 넘어 전국적인 체육대전을 개최함으로써 민족단결의 활력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1927년 YMCA 전국농구연맹전을 시작으로 1928년에 유도승단대회, 전조선탁구대회, 조선배구선수권대회 등이 개최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독립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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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야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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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황성)YMCA에서 보급한 야구의 초창기 시합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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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청년회 농구단 제3차 일본원정(1927.4)
웟줄 : 이규홍, 공기유, 장동욱, 최진영, 이혜택, 김영구
아랫줄 : 김진수, 정복경, 전성진, 이혜봉 -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유도부 승단승급 수여식(19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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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YMCA 권투 선수들
재건과 자립, 자각과 전환
이제 서울YMCA가 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미친 영향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해방의 감격은 재건과 희망의 새역사 창조로 우리 민족에게 다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간 좌우이념의 대립으로 사회가 혼란한 상태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서울YMCA는 대화와 협력의 사회를 갈구해 나갔다. 그 푯대가 신앙운동이었으며, 이는 평신도를 위한 종교교육 표방의 신학교육이라는 형식으로 성서연구, 신앙문답, 복음강연 등을 중점적으로 펼쳐갔다. 이 시기에 서울YMCA는 소년사업에 인원과 예산을 가장 많이 투입하였는데 이 역시 소년을 중심으로 한 신앙운동과 소년평화운동이 가장 역동적이었다.
6.25전란의 비극으로 서울YMCA회관은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YMCA는 부산 피난지에서 조차 그 조직력을 다져나갔으며, 6.25동란 후에는 전쟁고아를 위한 교육사업, 종교사업, 부녀자 구제 및 구호사업 등을 통하여 재건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53년 난지도에 삼동소년촌(三同少年村)을 건설하여 전쟁고아를 보호․교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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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로 폐허가 된 YMCA회관에서 노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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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동소녀촌을 내방한 함태영 부통령
옆에 현동완 총무의 모습이 보인다.
1960년대 서울YMCA운동의 최대과제는 자립태세의 확립이었으며, 그 자립의 기틀을 회관의 확보와 협력사업에서 찾으려 했다. 따라서 서울YMCA도 전쟁으로 소실된 YMCA회관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는데, 1963년 새 회관의 1차단계(3층)를 마치면서 한국 최초의 실내수영장을 갖게 되어 체육사업의 발전적 기틀을 다졌으며, 1967년 새 회관이 준공되면서 호텔사업도 시작하게 되었고, YMCA이념과 파리기준의 연구 및 기준헌장의 개정 등을 실현해 가는 가운데 프로그램 재건을 위한 노력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대표적 프로그램으로 1967년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YMCA상을 지향하면서 학사단운동과 청소년상 심포지움의 운영에 착수하였고, 1968년부터 다양한 사회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고 정론을 수립하는 장으로서 시민논단을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시민논단은 성장의 신화앞에 무기력하게 지리멸렬하는 제 가치관의 혼돈을 경험하며 성장하면서 정확한 상황 판단에 뒷받침된 우수한 이슈의 설정과 창의적인 운영방법의 적용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어 사회로부터 한국의 종교․사회단체의 가장 대표적인 사회참여 프로그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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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당시 소실된 YMCA회관 재건캠페인 (1958.10.25)
선두에 허정 재건위원장(서울시장)이 있고, 그 뒤에 회원들이 뒤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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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관신축 개토식(1959.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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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YMCA회관 낙성식(19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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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64주년 기녀 청년상 심포지움(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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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말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민가창운동
1970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사회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개발의 불균형과 사회문제들이 야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운동과제를 모색하면서 서울YMCA운동은 서서히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1972년부터 직업소년학교를 운영하면서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는 것으로, 그 교육을 통해 긍정적인 사회관과 능동적인 실천력을 갖춘 성실한 시민으로서의 품성을 길러 명랑하고 따뜻한 사회건설의 역군이 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또한 1973년 지역사회의 균등한 발전과 시민의식개발 및 복지향상을 기치로 사회개발단운동을 시작하였고, 1974년 과거 YMCA 농촌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는 YMCA 양곡은행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시민사회개발단운동은 기독교 사회참여를 YMCA운동으로 체질화하는 실험으로 중대한 공헌을 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운동을 통하여 주최자와 실무자의 노력만이 아닌 전(前)회원이나 비회원까지의 참여가 긴요하다는 새로운 교훈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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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이동 수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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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은행 개설식(197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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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개발단발단식(1973.10.4)
1976년에는 제23차 대한YMCA연맹 전국대회에서 한국YMCA 목적문을 채택하여 YMCA운동의 정체성을 유지․강화해 가는 가운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YMCA는 이 목적문에 입각하여 운동이념을 현장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1978년 부당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시민중계실 사업을 시작하였다. 시민주권 및 소비자운동으로 발전한 시민중계실 사업은 몇가지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정의실현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가 하는 현실인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제도나 시책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부조리의 노출, 그리고 이 중계실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애써 보다가 해결을 찾지 못한 힘없는 시민이나 영세민들인데, YMCA가 비록 흡족한 처리는 해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문제를 이렇게 관심과 친절로 들어주고 나서준다’는 인간존엄의 구체적인 체험을 하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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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클럽 입회식(19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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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가출대책세미나(제 4회, 1979.4)
시민사회의 빛과 소금
1980년대에 서울YMCA운동은 모든 활동영역이 균형적으로 장대한 발전을 하였으며, 특히 후반기에는 많은 민간운동의 산파역을 감당한 시기로 평가된다. 1982년 ‘YMCA운영개선 연구위원회’의 활동과 ‘YMCA 신풍운동’은 급변하는 사회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활력으로 밑받침되었고, 1983년부터는 유지․전문지도력간 YMCA운동의 방향과 과제를 토론하는 사업연구회가 시작되었다. 특히 80년대 초에는 청소년운동의 발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청소년성교육상담센터를 개설한 것이나 청소년문화광장 개설 및 동요운동의 일환으로서 ‘가족동요창작경연대회’가 시작된 것은 1984년의 일이다.
한편 국제친선교류가 유난히 활발한 시기로 평가받는 시기도 80년대이다. 1984년 8월 16일 한국기독교 백주년 선교대회에 참석한 미국․독일․일본 등의 기독청년들과 만나 국제친선운동가능성을 타진한 일이 있고, 7월에 뉴욕Y와 자매결연에 이어 1985년 타이페이YMCA와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이후 세계YMCA간 연대협력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것이다[서울YMCA 형제결연현황 : 나고야Y(1986.10.27), 호놀룰루Y(1988.10.27), 토론토Y(1990.2.3), 헬싱키Y(1991.8.26), 상파울로Y(1992.11.12), 싱가폴Y(1996.11.30), 도쿄Y(2000.5.25)]. ICYE(Inter- national Christian Youth Exchange) 창립도 이 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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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타이페이 YMCA와의 형제결연(198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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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YMCA 고교생 YMCA 방문
한편 1980년대 중반 한국의 경제발전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까지 있었으나 외채에 의존한 경제발전은 대외의존도를 심화시키면서 농촌경제를 피폐에 몰아넣고 부실기업을 양산하였으며, 빈부격차를 극대화해 가고 있었습니다. 1985년 4월 20일 ‘시민자구운동 결의대회’를 개최하며 시작된 시민자구운동은 많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양담배 안피우기 및 국산타이어 애용운동, 향락문화추방운동(1989) 등은 이러한 시민자구운동의 주요한 행동프로그램이다. 한 편 사회체육운동분야도 1986년 대한민국 체육부로부터 ‘제24회 대한민국 체육상(지도상)’을 받음으로써 서울YMCA의 위상을 한층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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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타이어 사용관련 국산품애용운동 (19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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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익변호인단 발족식(1986.4)
민족의 양심, 민간운동의 선도자
사회개발운동의 성과와 경험의 지평을 호가장해 가는 가운데 1990년대는 본격적인 지역공동체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급속한 산업발달에 따른 환경오염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1990년 9월에 환경오염의 문제를 중요 운동과제로 설정하고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한강물살리기 시민운동(1993-), 녹색청소년단운동(1997-), 녹색가게운동(1997-)으로 확대해감으로써 지속가능한 사회개발인식을 고조시켰다. 98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금모으기 운동’, 경제위축과 실직 따른 무력감의 극복을 위한 덤벨 체조의 지도 · 보급도 중요한 활동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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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감시단 교육(19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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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페놀사건 진상교육 촉구대회(1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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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물되살리기운동 청소년감시단(1994)
한편 민주화의 고조에 따라 관권,금권,지연,혈연 등으로 얼룩진 구태의연한 정치 행태를 극복하고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형성하기 위한 공명선거운동이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른 ‘의정감시단’활동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95년 지방자치, ’96년 제15대 총선, ’97년 대통령선거에서 공명선거 캠페인, ‘99년 TV토론 선거유세에 대응한 TV토론위원회활동은 선거의 공정성을 담보하고자 한 노력은 사회의 많은 호응을 받았으며 이는 지방자치제선거(2002)에서 10만인유권자위원회 활동으로 확대· 발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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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부정고발센터 현판식(1997.10)
1990년대 청소년운동은 입시위주의 교육제도로 인하여 청소년클럽이 한때 위축되자 청소년의 창조적 능력이 실현되는 건전한 청소년 문화육성에 중점을 두고 청소년 클럽육성과 청소년유해환경감시 부분에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1998년 청소년보호위원회로부터 ‘청소년보호대상(유해환경감시부문)’을 수상하였다. 더욱이 영상시대의 도래에 즈음하여 청소년이 주체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1998년부터 청소년 영상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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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청소년 영상페스티발(1998.9)
창립2세기 새로운 각오로
2003년 창립 100주년은 서울 YMCA는 물론 한국YMCA 운동사에 있어 또 다른 획을 긋는 중대한 전환기이었다. 창립 100주년 행사에 대통령을 비롯한 사회각계각층 인사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2세기의 비전을 선포하고, 지난 100여년간 YMCA운동을 일구어 온 선배들의 찬연한 성과를 계승하며 세기의 새로운 깨달음으로 새시대를 개척하고자 하는 각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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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는 노무현 대통령 (200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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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0주년 기념케익 커팅 (2003.10.28)
특히 창립 2세기의 서막을 열며 기념심포지움은 물론 논단 등을 통하여 YMCA운동의 목적과 이념을 재확인하고, 지난 100년간의 사록을 정리하여 미래 YMCA운동의 지표가 될 수 있도록 서울 YMCA운동 100년사, 사진으로 보는 서울 YMCA운동 100년, 서울YMCA 체육운동 100년사 등을 출판하였다. 또한 비전 2007, 비전 2012 등의 중장기 발전계획을 통해 YMCA운동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서울YMCA운동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국교육산업대상(2003), 청소년육성대상(2003), 한국농구 100주년 공로상(2007)등을 수상하였다.